사랑이라는 단어(11월3일,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켄 가이어는 그의 책 [묵상하는 삶]에서 교회와 신학교의 최고의 선언문은 사랑이라는 귀결을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R. A. Torrey가 말한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면 그분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 것은 가장 큰 죄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말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는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Cross)이 “하루가 저물 때 우리는 사랑한 것을 기준으로 심판받을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랑이라는 격과 질을 등한히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의 부재와 오용은 역사 이래 계속되어온 인간의 타락된 모습입니다. 인류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랑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면서 사랑은 변질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분의 마음은 일편단심 사랑이심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서4:8)”고 선포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크리스챤의 가정이 다가오는 문제들에 포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는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가정이 어려운 문제를 만나도 그 안에 십자가의 사랑이 있다면 결국 그 문제는 사랑의 힘에 녹아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죽음같이 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아가8:6).

 

사랑은 방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거나 세상을 향한 사랑이거나 그 방향이 그 질과 격을 달리해줍니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옷입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2년 전 제가 LA에 홀로 있으면서 자비량 사역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가족과 함께 있음이 얼마나 하나님의 큰 은혜였는가를 절실하게 배웠습니다. 감사하게도 사랑하는 식구들이 겨울방학동안 제가 거하는 곳에 다 모였습니다. 어느 날 밤 함께 디즈니랜드의 불꽃놀이를 구경하면서 밤하늘에 수놓아지는 아름다운 불꽃의 향연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려주시는 사랑의 단어를 보았습니다. 사랑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가족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별처럼 영롱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과의 거절할 수 없는 사랑, 끊을 수 없는 사랑, 변개, 변질되지 않는 사랑이 지금 우리 곁에 계신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시카고포도나무교회 김경환목사 목양칼럼 [사랑이라는 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