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바같은 신앙의 선배가 그립습니다(11월 1일, 수)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4:36,37).”

기독교 역사에서 사도바울의 역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입니다. 66권으로 구성된 성경 중에 13권이 사도바울이 쓴 서신이라는 사실은 전혀 믿기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의 엄청난 헌신과 열정은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나라(천국)로 인도하려는 예수님 마음의 투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사역 뒤에는 바나바라는 탁월하고 겸손한 주의 종이 있었음을 성경은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후 다소에 있었던 사울을 찾아가 안디옥교회로 데리고 와서 귀한 사역하도록 문을 열어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년 동안 함께 사역하면서 교회를 부흥시켰는데 교인들이 처음으로 크리스챤이라고 불림받게 될 정도로 잘 양육하였습니다.
그 후 흉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에 바울과 함께 부조금을 전달하였고(행11장), 그곳에 있는 마가를 데리고 안디옥에 돌아왔습니다(행12:25). 그러나 마가는 후에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함께 떠났던 선교여행에 동참했던 마가가 밤빌리아에 이르자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건이 발단이 되었던 것입니다(행13:13). 그 후 다시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될 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려가려고 했지만 바울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나바와 바울은 심히 다투게 되었고 각기 마가와 실라를 대동하고 서로 다른 지역으로 선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행15:36).

그 이후로 사도행전에는 사도바울의 행적만 기록되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바울의 주장이 옳았다거나 싸움에 승리한 자라고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바나바의 행적이 그 이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전히 그는 주님을 위해 선교하고 헌신했다는 것이 후에 마가의 행적에서 감동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마가를 상종하지 못할 자로 여겼던 바울의 태도가 그 후의 서신에서 180도 달라진 것을 보면 이를 충분히 증명해줍니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골4:10). 아니 그렇게 용납하지 못했던 마가가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후송되어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감옥에서 만난 바울과 마가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바울의 눈에는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럽게 보였을까요?

후에 바울이 임종하기 얼마 전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네가 올 때에 마가도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고 쓴 것을 보면 바울과 마가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동역자의 관계를 가늠하게 합니다.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이 진실하면 때로 과정이 부족하고 방법이 다를지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관계의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마가를 이렇게 믿음의 사람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삼촌 바나바였습니다. 험한 선교를 다니면서 신앙의 선배로서 마가에게 아름다운 본을 보였고 귀한 가르침을 전했기에 후대에 쓰임받는 귀한 일군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복음서 중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마가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바울과 마가를 세워주었던 바나바……….. 너무 외형적으로 발전하는 교회의 시대상과 참다운 신앙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들은 더욱 바나바같은 믿음의 선배를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좋은 믿음의 지도자를 만나 순수하고 거룩하며 온유하고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단장하여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가 되도록 인도함받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시카고포도나무교회 김경환 목사 목양칼럼 [바나바같은 신앙의 선배가 그립습니다]

단풍같은 신앙인(10월31일, 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5:16).

형형색색의 단풍들이 물드는 것을 보면서 가을이 깊어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을 바람이 가슴을 적실 때면 독실한 신앙인이셨던 고 김승현 시인의 “가을의 기도”라는 시가 떠오르곤 합니다. “가을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엔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엔 호올로 있게 하소서……”

 

가을은 계절적으로 보면 인생의 황혼기와 같습니다. 가을의 아름다움처럼 신앙의 황혼도 더 아름다워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는 인생의 황혼이 결코 아름답지 못했던 사람들도 기록되어 있고 정말 아름다운 황혼을 보낸 분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굳이 인생의 황혼이 아름답지 못했던 분을 꼽는다면 역설적이게도 저는 솔로몬왕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에게 퍼부어졌던 찬사와 그의 업적을 보면 당연히 인생의 황혼이 더욱 아름다웠어야 했다는 기대감에 대한 실망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태평스러웠고 가장 부강했던 시대를 구가했고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평가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젊은 왕 시절에 다른 나라와 정략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정략결혼으로 후궁을 칠백 명 그리고 첩을 삼백 명을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될 때 이방인들과 통혼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반드시 이스라엘백성들의 마음을 돌려 우상숭배를 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왕상11:2).

솔로몬왕은 결국 이방 아내들 때문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왕상11:3). 다른 왕 같았으면 하나님께서 그 당대에 비참하게 만드셨겠지만 다윗왕에게 약속한 것이 있으셨기 때문에 솔로몬왕 사후에 나라가 나누어지는 것으로 처벌하셨습니다. 아픔의 분단국가로 나누어지는 비극은 솔로몬왕의 황혼이 왠지 어둡고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인식할 사이도 없이 흘러가는 것이 세월입니다. 가까이 사랑하던 사람들이 한 둘 이 땅을 떠나기 시작할 때 가을 낙엽은 더욱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만듭니다.

시편에 모세는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90:9)라고 표현했고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빠른 세월속에서 신앙인들이 나이가 들면서 더욱 아름다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보배처럼 빛나는 영광입니다.

단풍을 보면서 문득 무상한 세월과 황혼을 생각하게 됩니다. 단풍은 봄의 파릇함과 여름의 강렬한 녹색의 세월을 보내고 맞이하는 자랑스러움과 아름다운 마무리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에 최선을 다한 여정의 마무리입니다. 이제 나무에서 떨어져 땅의 밑거름이 되려는 그 마지막 절정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너무 감동적입니다. 지나가는 계절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존재성을 잘 마무리하고 이제 마지막 아름다움을 남기며 떠나는 단풍진 낙엽을 보면서 세월의 낭비가 없이 자신의 삶에 충실한 “단풍같은 신앙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은 가을 바람처럼 가슴에 스며듭니다.

 

시카고포도나무교회 김경환목사 [단풍같은 신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