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같은 신앙(12월5일, 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오뚝이는 아무리 쓰러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만 번을 쓰러뜨려 보십시오. 만 한 번째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것이 오뚝이가 가지고 있는 특성입니다. 왜냐하면 바탕에 무거운 것을 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일으켜 세울 무게가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뚝이의 원리처럼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탕에 인생의 보배되신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보배와 질그릇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존귀성과 우리의 무용성을 대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질그릇은 연약하고 보잘 것 없고 가치도 없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이런 존재지만 예수님이 주인되셔서 우리 속에 계심으로 우리의 존재성이 한 없이 귀한 것으로 변화된 신분을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보배되신 예수님께서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고 사는 여정속에서는 오뚝이의 특성처럼 세상과의 싸움에서 결코 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4:8,9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당당히 선포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신앙인들의 동일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을 이긴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무너져도 다시 세워지고, 실패해도 다시 도전합니다. 오히려 절망의 과정속에서 우뚝 섬으로 생명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더욱 드러나게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세상의 인생들이 왜 공허합니까? 쓰러져서 일어서지 못하고 패배자의 자리에서 방황하며 절망가운데 있습니까?

보배되신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가치없는 질그릇으로만 살기 때문입니다. 생명되신 주님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도 여러 환경들을 만나게 됩니다. 욱여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고, 절망의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어두운 환경이 다가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 그러함에도 환경들에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는 영적으로 오뚝이 같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물과 불을 통과해도 그 속에 보석같이 빛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보배를 가진 사람들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심히 크신 능력을 보게 하십니다.

 

오늘도 생명되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충만히 거하셔서 우리의 주인이 되시도록 우리 중심을 그분에게 양보하였습니까?

시카고포도나무교회 김경환목사 [ 오뚝이같은 신앙]

[나봇의 일편단심] (12월4일, 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왕상21:4).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성도들은 자신의 유익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비록 목숨이 좌우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나봇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왕 아합은 왕궁에서 가까운 나봇의 포도원을 사고자 했습니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겠다고 했고 원하면 돈으로 그 값을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자신의 포도원은 조상들의 유산이기 때문에 결코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왕상21:4).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심히 근심하여 침상에 누워 식사도 아니 했습니다. 이를 본 아내 이세벨이 꾀를 내어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어 아합왕을 나봇이 죽은 곳에서 죽게 할 것이라고 하셨고 결국 전쟁터에서 전사케 하였습니다(왕상22:34-38).

 

나봇은 레위기 25:23의 “토지는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라는 말씀을 순종하였습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는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업이요 자신이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소유인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유를 팔면 더 좋은 것을 받을 수 있고 더 이익을 챙기는 일이 생길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나봇에게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신본주의입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왕의 청원을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분명한 말씀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철저한 이행자요 실천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생명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함에 있어서 어떤 손해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영원한 천국에서의 상급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셋째는 청지기적 물질관입니다. 그는 자신이 소유가 자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상들의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것으로 믿었습니다. 올바른 청지기적 자세였습니다. 청지기는 잠시 맡은 자요 그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올바른 청지기는 소유의 많고 적음, 질적인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직 주어진 것에 대한 충성이 있을 뿐입니다.

 

나봇은 레위기에 기록된 율법을 지키려다 죽었습니다. 아마 그는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그가 지킨 신앙의 바른 길은 이스라엘 역사의 기록에 올려져 있고 오늘 우리에게도 신앙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시카고포도나무교회 김경환목사 목양칼럼 [나봇의 일편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