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이라는 이름(10월13일, 금)

크리스챤이라는 이름

한국의 야구사에 “바람의 아들”이라 불려지는 유명한 선수가 있습니다. 이종범이라는 선수인데 그의 준수한 야구실력을 비유해서 불려지게 된 이름입니다. 그는 도루, 타율, 뛰어난 수비등 3박자를 고루 갖춘 보기 드문 선수였습니다. 최근 그의 아들이 프로에 입문했는데 프로 첫 해인 올해 “바람의 손자”라고 불려질 정도로 아버지를 닮아 뛰어난 실력을 뽐내었습니다. 이처럼 새롭게 붙여진 이름인 별명은 그 사람의 특성을 너무도 분명하게 표현해줍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우레의 아들(sons of thunder, 보아너게)”이라고 부른 제자들이 등장합니다(막3장). 세베데의 아들인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인 요한이 바로 그들입니다. 또한 시몬이라는 제자에게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더해주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형제를 친히 “우레의 아들”이라고 부르신 이유는 복음을 우레처럼 능력있게 외치는 자가 되라는 의미였습니다. 행적을 보고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장차 그런 이름의 성격을 드러내는 예언적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야고보의 행적은 특별히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지만, 특히 요한에 대하여는 그가 쓴 요한복음, 요한1,2,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사랑의 사도로 예언의 이름대로 불꽃같이 쓰임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크리스챤으로 부르셨습니다. 크리스챤(Christian)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의 안디옥교회 성도님들이 처

음으로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습니다(행11:26). 진실로 크리스챤답게 신앙생활했던 성도님들이었습니다.

 

크리스챤의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는 제자의 관계까지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모방하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요 천사도 흠모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과 명예가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책임이 따르는 기풍있는 이름입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1860-65)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가 있었습니다. 치열한 전투후 양군은 잠시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은 수많은 사상자와 부상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이 때 북군의 한 병사가 물통을 들고 부상군인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지역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남군은 사격을 가하다가 그 용감한 군인이 부상병들에게 물을 먹이는 장면을 보고 사격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휴전상태로 양군은 서로의 부상자들을 돌보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군 장교가 그 용감한 북군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이 군인은 대답했습니다. “내 이름은 크리스챤입니다.”

 

오늘 나에게 붙여진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불러주시는 그 이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를 품어내고, 그리스도의 사신(messenger)으로서의 편지(고후3:2)역할을 감당하는 아름다운 크리스챤이 되기를 더욱 사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원의 흔적 (10월12일, 목)

구원의 흔적  10월12일(목)

오늘의 양식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레슬리 던킨이라는 분이 소년 시절에 집에서 길렀던 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개를 시험하려고 고기덩어리를 개 앞에 던져놓고 “안돼”라고 말하곤 하셨답니다. 그 개는 고기 덩어리를 먹고 싶은 강한 충동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결코 고기를 쳐다보지 않고 아버지의 얼굴만 쳐다보더라는 것입니다. 만일 고기를 쳐다본다면 불순종할 유혹이 너무 크다고 느낀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유혹과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기고 해결할 수 있는 비결은 히 12:2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말씀처럼 오직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을 묵상하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늘 승리하였던 위대한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그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에 항상 주님을 대입시켰습니다. 그가 성령에 감동되어 기록된 서신서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내용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늘 기가막힌 표현을 함으로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인데 “자국, 상처, 도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기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살고 죽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니고 있었던 흔적 중에 첫 번째는 구원의 흔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 내용입니다. 교회가 부흥되면서 구원에 대한 이상한 주장들이 나돌게 되었습니다. 특히 유대인출신 크리스챤들은 구원에 대한 방법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단순한 진리가 너무 값싸고 쉽게 느껴졌기에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구원의 조건에 집어넣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접한 사도 바울은 통분하여 피맺힌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누구보다 율법을 열심히 지켰던 사람이요, 그래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여겨 핍박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빛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행9장).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예루살렘에서(행22장), 아그립바왕 앞에서(26장), 거듭 간증하였습니다.

본서신서 2장16절에서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동남아 전쟁 중 한 미군 공군 조종사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였습니다. 조종사는 낙하산을 타고 정글속으로 비상낙하하였습니다. 원주민중 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는 밀림을 뚫고 조종사에게 찾아왔습니다. 조종사는 “Where is the road? Where is the way out?(도로가 어디 있습니까? 어디로 나가야 합니까?)”라고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원주민은 “No road, I am the way! Follow me(도로가 없습니다. 내가 길입니다. 나를 따르십시오)”라고 말하고는 그를 안전한 마을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길과 방법은 수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천국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생명을 회복시키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첫 단추는 오직 예수님을 통한 구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잃었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분만이 인생에 해답이십니다. 고 김준곤 목사님은 “만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오직 예수이다.”라고 설파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흔적은 그 누구도 변개시킬 수도, 방해할 수도, 괴롭게 할 수도 없는 가장 값진 보물이요, 피난치요, 철옹성이요, 반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