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역설적 은혜](6월21일, 목)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기독교의 역사에 Phoebe Palmer(1807-1874)라는 여전도자가 있습니다. 남편은 의사이고 본인은 감리교의 평신도로서 감리교뿐만 아니라 다른 교단에까지 큰 영향을 끼진 분입니다. 이 분은 성령체험을 통해서 성결한 삶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는데(온전한 성화, Entire Sanctification), 이것이 후에 형성된 오순절교회들과 기존 감리교의 교리를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Phoebe Palmer 여사의 신앙과 신학에 깊은 애수를 갖는 이유는 그녀의 삶의 과정 속에 남들이 겪을 수 없는 깊은 상처와 아픔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 깊은 신앙을 체험하며 오히려 한 평생을 온전한 성화의 교리를 실천하는데 묵묵히 걸어간 분이기 때문입니다.

 

Palmer 여사는 20살에 의사인 남편과 결혼하여 그 다음 해에 첫 아이(Alexander)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Alexander는 9개월 후에 하나님 품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Palmer여사는 이 상상할 수 없는 아픈 경험을 통하여 더욱 하나님께 모든 삶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3년

만에 두 번째 아들(Samuel)을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Samuel도 몇 주 후에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Palmer 여사는 이것이 믿음의 연단임을 깨닫고 믿음생활에 더욱 열심을 내게 되었습니다. 결혼 한지 7년 만에 3번째 딸인 Eliza를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간호사의 잘못으로 아이가 요람에서 불타죽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Palmer 여사는 여인으로서, 어머니로서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아픔을 체험한 분입니다. Palmer 여사는 이러한 아픔들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왜 부르셨는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기만을 바랬습니다. 기도와 성경모임들을 주관하면서 모임에 참석한 분들이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했습니다. 신학적으로도 존 웨슬레의 온전성화를 현대화시킴으로 신학계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볼 때 Palmer 여사가 남긴 족적은 기독교 역사상 대단합니다. 그러나 이 분이 아픔을 통하여 더욱 더 하나님만 바라보았다는 사실이 더 위대하며, 하나님은 한 가지도 헛되게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시고 기억하셨다는 사실이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고난이 있어야만 온전한 성화가 일어난다고 전적인 동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금같이 나오기 위해서는 용광로를 통과해야 하는 인생의 항해는 세월을 통하여 동감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칭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단 번에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라면, 성화는 점차적으로 성장하는 단계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그것을 본받고 살아야 하며 성장해야 하는 절대과정이기에 신앙의 거룩한 삶이 바로 성화입니다.

 

오늘날 신앙의 문제는 구원받았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영화롭게 되는 단계까지 성장해 가야하는 책임을 분리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 가운데 그의 신앙이 순금같이 될 것이라는 고백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세월과 연단과 아픔이 신앙 성숙의 좋은 자극제가 됨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나고 나면 아픔의 과정이 다 감사함으로 고백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카고포도나무교회 김경환목사

 

[보지 못하고 믿는 자](6월7일, 목)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9).

 

오늘 본문을 보면 신앙인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아야 믿는 신앙인”과 “보지 못하고도 믿는 신앙인”이 그것입니다.

 

“보아야 믿는 신앙인”은 오감을 통해서 체험되는 것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환경을 절대시하는 육에 속한 신앙인입니다. 눈에 보이거나 현실적으로 무엇인가 갖추어져 있어야 안심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도 믿는 신앙인”은 오감을 뛰어넘는 영의 사람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나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되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우직하게 인정하고 믿는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애당초“보아야 믿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것을 목도한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알렸을 때 그것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막16:11).

 

그러나 안식 후 첫날(오늘날 주일)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셨을 때 그들은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요20:20). 이 때 공교롭게도 도마라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도마에게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하자 도마는 자신의 눈으로 보고 만지며 확인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요20:25). 열 제자들이 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이처럼 어느 한 제자도 예외없이 “보아야 믿는 신앙인”들이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후에 다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제서야 도마는 부활사건을 믿게 되었고 급기야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중요한 말씀을 하습니다.“보고 믿는 신앙인이 되지 말고 보지 못하고도 믿는 신앙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약속의 말씀에 대한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후에 제자들은 “보아야 믿는 신앙인”에서 “보지 못하고도 믿는 신앙인”이 되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말씀에 대한 태도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일어나거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런 결과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24:49)고 말씀하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마가다락방에서 응답의 때를 주님께 맡기고 전심을 다해서 한 마음으로 기도했으니 이는 바로 “보지 못하고도 믿는 신앙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의 근거와 대상은 예수님 자신인 말씀입니다. “보아야 믿는 신앙인”에게는 말씀을 신뢰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말씀은 당장 눈에 보이거나 잡히는 결과로 우리 앞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도 믿는 신앙인”은 말씀의 실상을 지금 못 본다 할지라도 그것에 개의치 않고 여전한 신뢰와 확신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믿는 복된 자들입니다.

 

시카고포도나무교회 김경환목사